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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친구와 다툼, 마늘종

by 진실한토마토 2020. 9. 25.

지하철과 기차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가격과 거리의 차이 외에도 이미지 면에서 기차가 훨씬 더 매력적이긴 하다. 기차여행, 터널 그리고 삶은 달걀과 톡 쏘는 사이다. 지하철은 왠지 재래시장 같아서 타는 재미는 있지만 분비는 시간 때면 몹시 피곤하다. 게다가 밤늦은 지하철은 취객도 많다. 그에 비해 기차는 매우 신사적이다. 기차는 비교적 여유롭고 역간의 거리 때문에 꽤 긴 시간 백색소음을 끊기지 않고도 즐길 수 있다. 지하철은 끝이 없는 터널로 다니고 기차는 심심할 만하면 한 번씩 터널을 통과하곤 하는데 딱 소가 눈 꿈벅하는 시간 만큼이다.


오늘은 민선이가 소영이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아침에 남편이 차를 가지고 가는 바람에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검은 창으로 민선의 모습이 보인다. 빗자루 머리숱을 자랑하던 머리카락도 이제 제법 듬성하고 지하철 형광등에 비춰 흰머리카락들이 은빛으로 반짝거린다. 50년인데...... 딱 소가 눈 꿈벅하는 사이 같다.


나는 벌써 일주일째 소영이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등굣길은 심심하기도 하고 또 함께 가야 엄마가 안심하시니 여전히 함께 지하철을 이용한다. 지하철역까지는 10분 거리다. 나는 늘 소영이는 집 대문 앞에서 소영이를 부른다. "소영아, 학교 가자~" 일주일째 매일같이 반복하는 단 한마디이다. 종종 실수로 소영이에게 말을 할 뻔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소영이에게 말을 거는 상상을 한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깔깔 웃으며 소영이의 손을 잡을까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아니다. 그럴 순 없다.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나는 또 다시 화가 나 얼굴이 화끈거린다.


민선이가 일주일째 삐쳐서 말도 안 한다. 분명 그날 아침 마늘종을 먹어놓고선 안 먹었다고 잡아떼놓고 마치 정말 억울한 것처럼 벌써 일주일째 나랑은 말도 안 한다. 나는 단지 입에서 마늘종 냄새가 난다고 한 것뿐인데 친구 사이에 그런 말도 못 해주나.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다. 꼭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자존심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지. 누가 이기자는 건지 해보자는 건데 그럼 나도 별 수 없다. '너랑 말 하나 봐라!'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나는 언제나처럼 서둘러 우산을 챙겨 소영이네 집 대문 앞으로 갔다. 소영이는 아침밥을 양 볼에 가득 씹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웃으며 내가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뒤에 벌어진 일이 하도 황당해서 구체적으로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글쎄 소영이가 나보고 대뜸 "너 마늘종 먹었지?"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사실 그대로 "아닌데?"라고 대답했는데 소영이가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다. "나 마늘종 못 먹어, 한 번도 안 먹어봤어, 근데 내가 어떻게 갑자기 마늘종을 먹어?" 소영이가 아주 가볍게 한마디 툭 던진다. "거짓~말!"


'이번 역은 신설동, 신설동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성수, 잠실이나 왕십리 방면으로 가실 손님은 이번 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시기 바랍니다. This stop is Sinseol-dong, ....' 순간, 민선의 우산이 미끄러져 서있는 앞사람의 발등을 콕 찍으며 넘어진다. "엇, 죄송합니다."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다행히 아직 다섯 정거장은 더 가야 한다. 갑자기 가슴에서 '툭'하니 우산 떨어질 때만큼 심한 진동이 느껴졌다. ; '다섯 정거장만 더 가면 소영이를 만날 수 있다. 내 친구, 소영이. 50년이란 세월을 어떻게 뭐하며 살았을까. 왜 그동안 연락이 없었느냐 물으면 뭐라 하지. 애는 몇이나 되려나? 남편은 잘 해 줄까.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날 보면 많이 늙었다고 하겠네. 그때 있던 보조개는 아직도 있을 테지. 어디 아픈 데는 없겠지. 매일 간식해 주시던 천사 어머님은 잘 계시겠지. 소영이는 워낙 그때도 예뻤으니까 여전히 곱게 나이 들었을 거야. 아픈 데는 없겠지. 무슨 말부터 할까...' 민선은 우산을 펴고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꽤 춥다. 고개 숙인 우산 저 너머로 푹신한 은색의 효도 신발이 보인다. 마치 민선의 은빛 머리처럼 반짝거린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민선은 순간 울컥하고 올라오는 뜨거운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콧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뭔가가 탄력 없는 턱 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효도신발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왔다. "민선이니...?"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전해졌다. 민선은 서둘러 우산을 위로 치겨들었다. 이번에는 진짜 빗방울이 무수히 날아왔다. 소영이었다. 소영이가 웃으며 거기 서 있었다. 마치 50년을 거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소영이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 모습으로 거기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문득, 중학교 때 단짝 친구가 떠올라 내키는 데로 짧은 글을 써 보았다. 쓰는 내내 웃고 울고, 역시 이래서 글을 쓰나 한다. 보고 싶은 친구, 그 시절. 다시 못 올 그 시절, 그리고 나.

참, 마늘종에 관한 이야기는 팩트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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