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난 극성엄마와 방목엄마 그리고 방관엄마의 차이가 그닥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것은 불려지는 이름에 불과할 뿐이고.
조금은 괴변 같을지 몰라도 나역시 모두이거나 어느것도 아니다. .
내가 본 어떤 방관엄마는 편의에 따라서 방목엄마로 위장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고,
종종 의식있는 방목엄마들은 아이들을 더 좋은 환경에 방목하기 위해,
-그것은 이미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정보를 수집하고 남달리 애쓰게되는데 그러다보면 어느새 극성엄마란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관엄마는 때때로 본인이 방목엄마라고 착각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엄마를 이런 형식으로 나눈다는 것은 (즐겨부른다는 것은),
내 생각이지만 정말 의미없는 일이다.
내 경우를 봐도 그렇다. (누군가 본다면)
블로그에서 열심히 육아일기를 쓰는 시은이 엄마는 극성엄마,
아이를 하루 24시간 보모에게 맡기며 학습지따위는 생략하고,
아이를 존중해줘야하는 교육관념에 올인하지만,
역시나 그런 자유로운 교육환경에 목마른 나는 방목엄마,
때때로 주말에 남편과 친구들 만난다고 시은이 나몰라라 하고,
새벽까지 놀다들어오는 시은이 엄마는 방관엄마 쯤일까.
물론 불려지는 입장에서 봤을때 그렇다는 얘기고,
난 그 어느것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물론 난 아이를 더 키워봐야 알 것이다.
고작 두돌을 넘긴 아이엄마는 모르는게 너무나 많다.
내게는 유치원를 보내고 학교를 보내는 일이 아직은 무용담처럼 느껴진다.
올해는 시은이도 유치원을 가야하는데,
생각이 많은날의 나는 극성엄마가 되었다가,
잘 될거야 하늘에 맡기고 싶은 날에는 방목 혹은 방관 엄마가 되는데,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난 그냥 한 아이의 엄마라는 것이다, 시은이 엄마.
불려지는 이름에 가끔은 신경쓰여도 –그렇지 않다는 것은 거짓-
그것이 의미없다는 것을 아니 그냥 그 정도로 다행이다싶다.
엄마들은 그렇다.
서로 관심들이 넘쳐나고 뒤떨어질까 두렵고 하지만 누구보다 특별하고 싶다,
이 얼마나 모순인가.
남들과 같은 길을 따라 가는데 어찌 남보다 특별할 수가 있을까.
나는 아이를 키우는 일 외에도,
인생은 삶 자체가 소신을 지켜나가는 험난한 과정이라는 것을 수시로 깨닫지만,
때때로 나의 그 의지가 지나쳐,
오히려 세상에 대한 ‘잠재된 반감’ 을 키우는게 아닐까 괜한 걱정을 하곤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나의 그 잠재된 반감이 아이를 구석으로 몰지는 않을지,
노파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소신의 한 예이고 난 그런 예를 주변에서 봐왔다.
결론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모두 극성엄마, 방목엄마, 방관엄마 일 수도 아닐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난 어느것도 더 선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것 하나 극단적이지 않은 것이 없고,
또 어느것 하나 순간적이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싶고,
아이가 잘 되길 바란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오직 원하지 않았던 외부 환경에 의해서 뿐이다.
물론 그렇게 흔들리는 의지 박약한 엄마들때문에,
요즘은 ‘엄마는 강하다’라는 말도 모두에게 해당하진 않는듯 하다.
이렇게 말하면 방목하는 엄마들이 좀 억울할까?
방목 엄마들에 대한 생각은 그렇다.
난 요즘 세상에선 방목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방목은 환경이 중요한데,
지금 엄마들은 그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기위해 또 극성을 부려야한다.
그냥 잘자라겠지 하고 내버려두기엔 세상이 단조롭지 않다.
마지막으로 소신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보태고 싶다.
보이지 않아도 사실 우리 시대에 소신엄마들이 의외로 많이 숨어있다.
때론 극성엄마와도 같은 선택을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극성엄마로 보이기도 하지만- 혹은 스스로 조차도 그렇게 여긴다-
그 둘 사이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는 따라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대부분 극성엄마는 독립적인 선택은 못한다.
그에 비해 소신엄마들은 꽤 용감하고 그래서 더 힘이 든다.
물론 그런 소신엄마들도 역시 문제점이 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일부의 소신엄마는 세상에 대한 ‘잠재된 반감’ 내지는 ‘지나친 경계심’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져 옳지 못한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역시 같은 이유로 세상을 등지는 교육을 하게 될 우려도 있다.
아이에겐 또래의 동질성을 느끼는 것도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그 어느 시대에 살고 또 어떤 시대의 문제점이 있던,
그 시대를 직시해야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야 함께 살아지는거다.
모든것을 아는것이 꼭 모든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닌 이유이다.
사실은 그나마 가장 사랑스러운 소신엄마들을 위로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글인데,
어째 내 글이 모두 틀린것으로 몰아간다.
글이 길어지니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면,
마지막으로 그럼 나는 누구여야 할까?
그래 하고자 하는 말을 이미 눈치 챘겠지만 나는 그냥 ‘시은이 엄마’ 일 뿐이다.
소신엄마, 극성엄마, 방목엄마, 방관엄마 역할까지 고루고루 발란스 맞춰가며,
어느것 하나 지나치지 않게 아이에 맞는 엄마가 되어주는 것
내지는 나에게 맞는 엄마가 되는것.
그것이 내 이름인 것이다.
그것이 엄마일때 우리들 이름이어야 한다.
이 말을 하지 않고 지나갈 수가 없는데,
문득 매체가 얄밉다.
자꾸 말을 단축시키기 위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이름을 지어버림으로써,
사고를 가둬버린다.
때론 정말 눈감고 살고싶어진다.
–주제와는 다른 엔딩이다-
오늘은 네이버 상태가 좋아 시은이 사진 한장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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