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은이가 두돌이 되었을때 나는 이미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려 시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계획을 바꾸어 한글떼기를 일단 접어두기로 하였는데, 왜 그렇게 하기로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하고자 한다. 이맘때 아이들의 놀라운 암기력을 증명하기 위해 일단 아이자랑을 해 보이겠다. 红豆 王维 (왕유) 红豆生南国, (홍두생남국) : 홍두는 남쪽 나라에서 자라는데, 愿君多采撷, (원군다채힐) : 원컨대 그대여 홍두를 많이 따 두시게. 此物最相思。 (차물최상사) : 그것이 가장 사람을 그리워하게 만드니까
春来发几枝? (춘래발기지) : 봄이 왔으니 얼마나 피었으려나?
글은 모르지만 이 시는 시은이가 두돌이 채 안 되었을 때쯤 곧잘 외웠던 중국 고대시다.
그맘때쯤 시은이는 당시 십 몇 수과 삼자경 앞부분을 달달 외웠고,
노래가사며 율동이며 한두번 접하면 곧 잘 따라하곤 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왠지 아이가 월등히 우수하고,
그에 만만치않은 어른의 노력이 필요했을듯 싶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은이는 평범한 아이다.
단지 좋아하는 것을 쉽게 익힐뿐이며 모든 아이들이 사실 그렇다. (시은이는 엄마처럼 숫자에 약하다)
시는 낮에 아줌마가 노래부르듯 불러줘서 자연스레 익혔고,
노래와 율동은 뭐 말할것도 없겠다, 즐거워서 익혀졌다.
처음 시은이가 당시를 달달 외웠을때 사실 엄마인 나도 놀랍고 자랑스럽긴 했지만,
사실 별 일 아니였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여기서 일단 중국의 꽤 많은 아이들이 어릴적 시를 암송한다는 점을 알아두길)
다시 엄마인 내가 시은이의 암기력에 놀랐을 시점으로 돌아가본다.
부끄럽지만 난 시은이가 상당히 똑똑한 아이인가 싶어,
뭔가 엄마로써 방치할수가 없겠다 싶었고 곧 한글떼기 관련 정보를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대충 어떻게 가르치면 좋겠구나 하고 나름 확신이 서는 시기쯤에,
난 커다란 좌절을 격었다.
고시와 노래가사 율동 심지어는 노래계명까지 달달 외웠던 시은이가,
글쎄 검정색의 글자를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것,
설령 한두번 눈길을 주어도 좀처럼 암기하지 못했다.
게다가 엄마를 보는 시은이의 눈빛이 더 가관이다.
‘엄마 왜그래’ 라는 눈빛.
아무튼 절대로 기억해내지 못하는 아이를 접하는 순간,
난 꽤 답답했지만 다행히 내가 틀렸다는 생각이 가볍게 들어 아이를 놔주었다.
역시 맞다.
세돌 미만의 아이에겐 학습을 강요할 수는 없는것이다.
아이가 그것을 스스로 즐기때에는 이미 학습이상의 놀이가 되어있을것이니.
아무튼 처음엔 단지 역시 이론과 실제는 다르구나 했다.
그리고 다시 시은이에게 맞춤인 학습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검정색의 무료한 커다란 글자따위를 보고싶지 않아했고,
어렵게 몇번 눈길을 줘봐도 봤던 것을 또 보여줘 봐도,
아이는 기막히게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래 아이는 흥미를 느껴야 흡수하는 구나.
라는 진리를 몸소 깨달았지만 난 계속해서 바보같은 한글떼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난 아이에게 흥분점(관심 포인트)를 찾아주지 못하는 것이 나의 부족이라고 생각했다.
이맘때 아이들이 검은 글자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난 인터넷 검색과 자료 전문서적을 통해 여러가지 한글떼기 놀잇거리를 구해보았고,
그 중 시은이만의 캐릭터 ‘똥갈비’를 이용했던 것이 가장 효과적이였다.
암튼 덕분에 시은이는 짧은시간 동안 몇가지 단어를 통째로 암기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몇개월 전 시은이가 약 스무개 이상의 한자를 익힌것과도 별 다를바는 없었다.
이렇게 꾸준히 반복적으로 인내심있게 놀이해준다면 (물론 이것이 최대관건이겠지만),
정말 세 돌 전에 한글을 깨치기라도 할 것처럼 머릿속이 번득이는 순간들이 몇번 있었다.
그리고 마치 과제를 끝낸것처럼 벌써부터 기뻤다.
그런데 한가지 또다시 나를 머뭇거리게 하는 사건이 생겼다.
(나의 연구심은 타고난 성향이고 나의 지독한 취미이니 흉보지 말아주길)
얼마전 아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즐겨보았던 '달님안녕'이라는 책을 꺼내보며,
달님안녕이라는 글자를 익힐때였다.
내가 그 멋진(개인적으로도 정말 좋아하는 책이다) 그림 책을 읽어주는 내내,
아이는 그 무미건조한 검은 글자만 빤히 보고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조금후 아이는 읽어달라며 정말 재밌어 보이는 또 한권의 책을 뽑아왔다.
책을 펼친후 나는 나도 모르게 글자로 손가락이 집어졌고,
이번에도 아이는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림을 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
심란하다.
누가 뭐라고해도 나는 내가 틀렸다는 것을 너무나도 뻔히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어주고 있었다.
너무나도 재밌어보이는 그림들과 예쁜 색감들은,
내 손가락틈 사이로 무의미하게 새어나가고 있었다.
어찌보면 내가 영화를 볼때 자막을 즐겨보지 않는것과 같은 이치일까.
아무튼 이 계기는 나로하여금 한글을 가르치는 것을 보류하도록 하였다,
물론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금 시은이는 그림책을 봐야하는 시기이고,
최소한 시은이 스스로 글에 관심을 보일때까지 기다려야한다, 바로 질문하는 시기,
나는 아이에게서 그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더 자라면 어쩌면 기회조차도 없을),
상상의 영역을 글이라는 틀에 묶어서 규정지으려 한 것이다.
글이 또 길어지려하니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사실 난 한글떼기 자료를 찾으면서 제일 먼저 그 흔한 진리를 얻었다.
‘아이가 원할때 가르쳐라’
하지만 당시 난 그 의미를 깊이 체험하지 못했기에 일단 무시했던 것이다.
마치 내가 인생의 수많은 진리들을 몸소 깨달았을때와 그렇지 않았을때처럼.
난 참 인간다운 실수를 범한 것이였다.
그래도 다행이지, 알았으니.
정말 어떤 전문가의 말처럼 세 돌 전에 아이에게 숫자와 글을 입력시킬 수는 있겠지만,
(정말 해보니 가능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마트면 더 중요한 (의미있는) 것을 놓칠뻔 한 것이였다.
그리고 다시 (일부) 전문가들의 지나쳐버렸던 한마디를 떠올려본다.
한글떼기에 가장 적합한 시기는 아이 스스로가 글자에 흥미를 가질때라는 것.
내 아이가 조금 더 빨리 한글에 흥미를 가질것이라 생각했던 것은,
단지 엄마의 바램일 뿐이였던 것이다.
나는 다시 시은이에게 그림을 읽어줄 생각이다.
시은아빠는 나보고 변덕이라지만 내심 내 이야기에 동감해주니 좋다.
그리하여 지난 저녁 시은이에게 난 목 걸걸해질 정도로,
한시간 꽉 채워서 그림책을 읽어주었다.
끊임없이 ‘또 보자, 또 보자’ 하며 책을 가져오는 아이의 미소에 피곤함은 녹아버리고,
이렇게 말하지 않고는 버틸수 없는 육아 생각에 블로그를 펼쳤다.
아이를, 아이를 기다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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