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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느리게 사는법

by 진실한토마토 2013. 7. 17.

한번은 아이가 길다란 플라스틱 용기에서 과자가루를 먹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동그란 원기둥 형태의 용기) 그 모습은 마치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 속 여우의 모습 같았는데 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이에게 도구를 사용해보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했고 시은이와 과자가루와의 사투는 그렇게 시작됬다.

 

원기둥이 깊어서 숟가락을 넣어도 잘게 부숴진 과자가루는 온전히 담겨지지 않았다. 녀석은 아직 용기를 기울일 마음이 없었고 끙끙대며 수차례 숟가락질을 해 댔는데 그 모습은 정말이지 흡사 실험실의 원숭이와 같았다. 순간 난 아이가 무척 답답하게 느껴졌고 왜 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왜? 저 간단한 것을 못할까? 어쩜 저렇게 간단한 것을 못할까? 저 비슷한 것은 해내더니 왜 저건 또 못할까? 왜 머리를 쓰지 않을까? 정말 못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난 내 아이가 똑똑하다는 생각을 그닥 해 본적이 없는것 같다. 워낙 '똑똑함'을 믿지 않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걸 보면 그게 나의 한계인가보다. 사실 처음부터 엄마로써의 난 세심하게 아이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석하는 것 이외에 그 어떤 특별한 인내심도 갖고있진 않았다. 단지 내가 즐기는 부분에 있어서는 충분히 기다려 줄 수 있다는 것. 즉, 시간에 쫒기거나 심신이 피로할땐 나도 어쩔수 없는 화내는 엄마인 점을. 나는 재삼 강조한다.  

 

아무튼 그래도 나는 오늘 충분히 나이스한 엄마,  

 

1. 녀석, 하다하다 안되니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난 바쁜척하며 곧 도와주겠다 말하고 시간을 벌었고.

2. 몇번 헛 숟가락질을 하다가 급기야는 원기둥을 기울이는가 싶더니 물 마시듯 과자가루를 마셔버리는 녀석.

3. 결국 가루가 여기저기 엎질러지고 다시 엄마를 부른다.  

 

시은: 엄마, 도와주세요! 엎질렀어요.

엄마: 그래? 괜찮아. 치우면 되지.

 

마른 휴지를 가져다가 엎질러진 가루를 닦으려니 쉽지 않지. 과자가루는 더 넓은 범위로 흐트러지고. 아이는 이제 무척 짜증이 난 듯 하다.

 

엄마: 시은아, 바닥에 과자가루를 만져봐.

시은: (만지작 만지작)

엄마: 어때?

시은: 끈적끈적하지.

엄마: 그렇게 치우면 되겠네.

 

바쁘게 움직이는 시은이의 손. 손바닥으로 짚기만 수차례, 바닥의 과자가루를 다 치우고나자 다시 용기안의 과자가루가 먹고싶어진 녀석 또다시 숟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다가 마침내는 용기를 기울이고 과자를 퍼내 흡입하신다. 긴시간 집중한 덕에 나오는 한숨과 함께 무척 만족스러운 표정.

 

답답한 엄마가 재촉하지 않은 덕분에 오늘 우리집 꼬마 원숭이는 그렇게 또다시 '사는법' 한가지를 배웠다.

 

아가, 몰라도 좋다 똑똑하지 않아도 좋다. 조금 미련하게 돌아가도 좋고 천천히 가도 좋다. 힘들땐 힘들다고 푸념하고 잠시 쉬었다 가는것도 좋겠다. 단 포기하지만 말렴. 주저앉지만 말자. 가는길이 힘들어도 그 길의 끝엔 좋은것이 있다고 마음으로 믿기를. 단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아가, 너는 행복할 수 있단다. 엄마는 그렇게 네가 느리게 사는법을 터득하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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