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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왜 자연인가

by 진실한토마토 2013. 7. 17.

어째서 우린 자연이 그리운걸까. 왜 어떤 사람들은 편리한 도시를 떠나 귀농하고 엄마는 아이를 데리고 들로 산으로 바다로 떠나는 것일까? 공기가 좋아 건강에 좋고 도시의 빠름보다는 자연의 느림이 스트레스에 좋다는 등 일반적인 이유 외에 진지하게 '나만의 이유'를 생각해 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에 오늘은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봐도 좋을만한 한가지 생각을 끄적여본다.

 

어떤 분인지 정확한 기억이 없어 부끄럽지만 언젠가 인터넷 자료를 뒤지다가 보았던 이야기다. 일단 시인이라고 해 두자. 모 시인의 어릴적 이야기인데 한번은 시골 마루에서 놀던 어린 시인이 어머니가 마당에 뜨거운 물을 부으려하자 화급히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뜨거운 물을 마당에 붓지 말았으면 해요. 마당에 살고있는 벌레들이 죽어버리면 가엾잖아요"

 

추상적인 사고를 못하는 다섯돌 녀석들은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 '잔인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움직이는 생물을 보면 호기심에 눌러도 보고 찔러도 보고 더한 행동을 하기도 하는데 그건 왜 그럴까? 그리고 우린 그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구는 지금 아프다. 세상엔 환경보호 관련 동화책도 많고 잘 만들어져 눈물 쏙 나오게 하는 공익광도도 우린 종종 접하고 산다. 하지만 자연환경을 지키는 일에 동참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은 이유는 대체 뭘까? 지구가 아파도 샤워물은 콸콸 틀어야 개운하고 지구가 아파도 꼭 자가용을 끌어야하고 지구가 아파도 재활용이 불가한 쓰레기는 넘쳐난다. 아. 더이상은 부끄러워 요건 여기까지.

 

일단 나는 나부텀 지구를 나몰라라 하는 이유가 바로 자연을 멀리한 내지는 '가끔' 접한 것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연은 생명이다. 가끔 접하는 것이 아닌 늘 가까이 피부로 느끼고 부대끼며 그 소중함을 깨달아야하는 대상인데 지금 우리는 그럴 수 없고 그렇지 못하다. 한번은 아이들이 유치원 마치고 놀이터에서 놀 때였다. 어떤 여자아이가 "벌레다"라고 소리를 지르더니 꽤 덩치큰 벌레를 달려가 '잔인하게' 밟아버리는 통에 나는 질끈 눈을 감아야했다. 비록 나는 여기서 '잔인한'이란 표현을 썼지만 사실 아이는 잔인함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는 '잔인함'이란 심신의 고통을 이해하는 나이에나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유년시절의 나는 호기심에 장대를 들고 제비집을 쑤신 적고 있고 개미허리를 두동강 낸 적도 있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마음에 둔 적이 없었고 그럴만큼 그들과 '친'하지도 않았다.

 

몇년 전 흥행한 <아바타>란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판도라에서 나비족들이 자연에 임하는 자세가 내겐 참 인상적이였다. 그리고 잠시지만 자연과 어우러져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우리가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지 못하는 내지는 홀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과 우리는 결코 친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찾지만 자연을 곁에두지 못하고 자연을 그리워하지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돌보는 방법도 잘 모른다. 어린이는 왜 잔인하지 않지만 개미를 밟아죽이는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왜 잔인함을 알 나이에도 우리가 자연에게 저지른 만행들에 둔감한 것일까. 

 

나는 다시 밟혀 죽은 개미를 떠올려본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만약 그 '개미'가 우리집 앞마당에 '살고있는' '개미'라면 어땠을까.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보고 가까운 발치에서 쭈욱 만나온 '친한사이'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그 개미의 가족과 친구 그리고 부족들과 마당에서 한 집에서 쭈욱 함께 살고 있다면? 그들이 살아 있고 먹이를 먹고 때가 되면 죽기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도 우리 삶의 일부임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우리가 과연 '살아있는' 개미에게 잔인할 수 있었을까. 또 어른이 되어서 잔인함을 아는 나이가 되었을때에도 '함께 자라온 그런 고마운 자연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이상 자연은 필요할때 그리울때만 찾는 것이 아니어야한다. 아니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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