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락방

잃어버린 자존감을 찾아서

by 머니위너 2013. 7. 17.
지난밤 아이에게 책을 읽어 줄 때였다. 아기 동물들에 관한 책이였는데 귀여운 흰곰과 검은곰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그림을 보다가 아이가 말한다.

시은: 엄마 여기 흰곰은 란란이고 (최근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이다) 검은곰은 나야.

나는 문득 검은곰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져서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 시은인 검은곰이 흰곰보다 좋아?
시은: 아니. 흰곰이 더 좋지.
엄마: (내심 속상해짐) 근데 왜 흰곰을 친구하라고 해?
시은: 내가 흰곰하면 란란이는 기분이 안좋아지거든.
엄마: 그럼 시은이 기분은?

여기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할까한다. 시은이 반의 한 내성적인 성향의 친구 이야기이다. 한번은 다른아이 둘을 포함해 넷이서 우리집에서 밥을 먹을 때였는데 여자아이들답게 공주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그 내성적인 아이가 시은이를 가르키며 했던 말 "여기서 네가 제일 예뻐. 나도 안예쁘고 얘도 쟤도 안예쁘고 네가 젤 이뻐"
 
평소 이 아이는 친구가 하나 이상이 되면 늘 집단에서 떨어져나와 혼자 논다. 슬프게 느껴지는 일이 많아 '소리없는 눈물'을 삼킬때가 참 많은 아이. 그 부모는 어떨땐 왜 우는지조차도 알 수 없어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이 아이에게 유아의 '본성'이 없는것은 아니다. 더 갖고싶어하고 이쁘다는 소리 듣고싶어하고 또 칭찬받고싶어하는 욕구. 일년 전 쯤에도 이 아이는 자주 우는 아이였지만 적어도 자신의 기분을 무시한 채로 타인에게 과하게 양보하고 스스로를 깍아내리거나 친구들의 눈치를 보는 아이는 아니였다.   

아무튼 그때부터 종종 들었던 생각이 좋아하는 친구를 (잃을까봐) 두려워하기도하는 아이의 이중적인 마음이였는데 지난밤 나는 우리집 아이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음을 엿보게 된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어릴적 한동안 그런 두려움을 가진적이 있었더랬다. 마치 모든 아이가 뺏거나 뺏기거나의 두 가지 경험 둘 다를 가지고 있는것처럼 말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친구가 화날까봐 예쁜 흰곰을 양보하겠다는 아이에게 나는 다시 물었다. 사실 잠시 말문이 막혀버린 나였다. "그러면 안되지"라고 말 할 수도 "양보 잘했어" 라고 말 할 수도 없는 상황. 늘 양보만하는 아이는 아니고 나 역시 양보만 강조하며 키운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아래 아이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 모든것이 사실은 내가 고민할 몫이 아니였다는 점을 깨달았다.

엄마: 시은이도 갖고싶던 흰곰을 못가짐 속상하지 않아? 그런데 왜 흰곰을 란란이 하게 하고싶은거야?

라고 물으니 아이가 한마디 한다.
시은: 그건 그렇게 해야 둘 다 기뻐질 수 있기 때문이야.

아이는 별 다른 계획 없이 자신의 기분을 표현했을 뿐이지만 난 그 순간 어딘가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이 들었다. 나 조차도 가정에서 사회에서 또 다른 어느 집단에서 늘 풀지 못했던 문제였는데. 이렇게 아이의 한마디에 풀려버렸다. 문제에 부딪혔을때마다 나를 내려놓을지(버릴지) 상대에게 항의해야 할지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망설였던 나, 쟀던 또 쟀던 내 마음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정말 다행이였다. 아이가 두 사람 모두의 마음을 염두해두고 있어서. 진정한 평안은 모두의 평안에서 시작된다는 것.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
그렇다고 난 내 아이가 위에 언급했던 아이와 다른 특별한 생각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 마음을 인식해 낸 것과 미처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가 아닐까. 둘 다 기뻐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내 마음'을 염두해둬야 양보를 할 지 말아야 할 지가 판단이 설 테니까 말이다. 즉 중요한 건 내가 우려한 것과는 달리 아이의 양보는 결코 스스로를 슬프게 할 만큼이 아니였다는 점. 마치 내가 친구와는 돈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설령 돈거래를 하게 되더라도 '없어도 될 만큼'의 금액만큼이라고 정한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보자. 시은이에게 내가 뭔가 다른 대답을 유도했더라면 어땠을까. 어쩌면 난 아이의 마음을 읽어낼 좋은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때때로 아이의 순도 100프로 진심은 있는 그대로 표현해내기만해도 귀한 것이 되는것 같다. 그러니 우리의 몫은 대신 생각해주는 것도 엉터리 답을 알려주는 것도 아닌 아이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기다려주는 것일게다. 
 
 
어쩌면 내 인생의 모자란 자존감은 내가 시은이 요만했을때쯤 잃어버린건 아닐까.  
아이를 통해 배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