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m+
시간은 보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은아빠가 출장가고 엄마가 시은이를 픽업해야했던 어떤날이다.
(평소에는 비교적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시은아빠가 아이를 픽업한다)
허겁지겁 시간맞춰 퇴근한 엄마는 유치원 앞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시은이를 기다렸고,
5시가 조금 지나자 시은이네 반 아이들이 나올 시간이 되었다.
나 역시 다른 엄마들처럼 유치원 문앞에서 줄맞춰 나올 시은이를 기다렸다.
앞에서 세 네 번째 쯤에 서 있던 시은이,
이쁜 녀석,
멀찌감치 엄마를 발견하고선 기뻐 어쩔줄 몰라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웃는다.
그리고는 자기 차례가 될 때까지 ‘엄마, 엄마~’ 하며 손흔들며 발을 동동 구른다.
그리 좋을까.
곧이어 엄마는 차례가 되어 뛰어나오는 시은이를 양팔 벌려 꼬옥 안아주었고,
시은이는 엄마품에 안겨서 볼이며 입이며 이마며 엄마 얼굴에 뽀뽀를 퍼붓는다.
아, 행복하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붐비는 유치원 정문을 나와 시은이를 내려놓으니,
시은이가 갑자기 안아달라고 울며불며 떼를 쓴다.
평소 아빠가 픽업할 때에도 안아달라고 하지 않던 시은이가,
무슨 일인지 엄마를 곤란에 빠트리고 있다.
게다가.
500명의 원생들을 픽업하는 시간에 그 유치원 정문앞에서 말이다.
여기서 ‘유치원 앞에서’ 라는 사실은 어른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하다.
선생님과 아이들 엄마들을 포함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
내가 ‘망신스럽다’고 여기기에 딱 적합한 조건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전부로 오해되기 아주 쉬운 상황.
앞뒤 정황과는 상관없이 ‘몹쓸엄마’로 인식되기에도 딱 좋은 상황.
평소 아무리 잘난척을 해도.
나는 솔직히 이런 순간들이 참 두렵다.
답은 알지만 그것을 푸는 과정은 알 수 없는 마음.
차라리 정답을 모른다면 좋을까.
그래서 이런 두려운 시간들이 올 때면,
내 표정과는 달리 심장은 두근두근 심하게 뛰어댄다.
난 일단 아이를 몇 보 거리의 ‘가까운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내 체면도 체면이지만 난 아이의 자존심도 챙겨야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눈에 띄지 않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안아줄 수 없다는 행동 제안이 있기에 멀리는 갈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아이는 이번에 제대로 막무가내다.
협상을 해야겠다.
첫번째 협상: 일단 정석으로
엄마: (또박또박 목소리 깔고 하지만 위협적이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은아, 우리 시은이 엄마가 안아줬음 싶구나.
그런데 엄마는 가방도 들었고 시은이 무거워서 오래 못 안아.
게다가 겨울이라 시은이랑 엄마가 옷도 많이 입어서 안기가 더 힘들어.
우리 시은이 평소에도 아빠랑 씩씩하게 집으로 잘 걸어가잖아.
엄마는 시은이가 평소처럼 씩씩하게 걸어갔음 좋겠어 .
여전히 징징 거린다, 협상 결열
두번째 협상: 일단 퇴보
엄마: (웃어 보이며) 시은아, 좋아 그럼.
엄마가 시은이를 안고가기 너무 힘이 들것 같지만,
시은이가 그렇게 원한다면 저기 저 모퉁이까지만 안고갈께.
어때?
평소에 잘 먹히던 방법인데 왠일일까, 여전히 훌쩍거린다.
역시 협상 결열
좌절후 협박 & 비굴
엄마: (정말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등에 땀이나는 중이다)
(애써 화를 참으며) 정말 이렇게 계속 울거야.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보면 시은일 어떻게 생각하겠어. X
엄마는 또 나쁜엄마라고 생각할거아냐. X
제발 그만 울고 집에 가자. X
휴.. 그래 그럼 집에 가지 말자. X
여기서 계속 울어, 엄마는 갈거야. X X X X X X X X X
시은: 엄마 나쁜엄마 아냐…으앙..
소리를 지르지 않은것 빼고는,
난 이미 할 말 안할 말 다해버렸다.
이젠 더 울어댄다.
사실 이 순간에도 내 머리는 굴러가고 있다.
끊임없이 ‘이러면 안되’라는 말을 되뇌이며 애써 목소리는 역시나 부드럽게 유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최악의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날은 춥고 바람은 불고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다.
게다가 시은이로 말할것 같으면,
유치원에서 유일한 한국인으로 이미 유명세를 좀 탓던 터였다.
아…
누가누가 쳐다보는지 신경쓸 겨를은 없지만,
이 와중에 한국인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아 또 많이 신경쓰인다.
게다가 이렇게 추운데서 울리다가 아이가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한다.
휴.
모르겠다.
어떤 엄마들은 내게 그까짓것 한번 안아주지 뭘 그러냐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그 두꺼운 옷을 입고 또 가방 두개를 들고 17킬로가 되는 아이를 안고,
아무렇지도 않게 집까지 걸어갈만한 힘은 없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오늘 하루 이번 한번만이 아니였다.
난 일단 숨을 한번 깊게 내쉬고.
다시 한번 우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엄마: 시은아, 이제 집에 가자.
엄마는 시은이가 추운데서 울다가 감기에 걸릴까봐 걱저이야.
다른 친구들도 모두 씩씩하게 걸어서 집에 가잖아. (X)
역시 비교는 옳지않다,
그 순간 난 아이에게 역비교를 당했다.
하필 이때 건장한 체격의 여성이 한 아이를 안고서 걸어가고 있었던 것,
시은: 저기봐, 엄마, 저 친구도 엄마가 안고가잖아.
아…
그런데 그때 난 아이의 부러움에 가득찬 눈빛을 봐 버렸고,
순간 내 속에 잠자고 있던 너그러움과 안스러운 마음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또 한번 역시 늘 합리적으로 협상만 하려는 엄마의 차가운 머리로는,
아이의 예민한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는가보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난 일단 내 체면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엄마: (일단 안아주며 귀에 속삭이며) 시은아
시은: …
엄마: 우리 시은이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매일 와서 데리고가니까 많이 부러웠구나.
그런데 엄마가 시은이 맘 몰라줬네~, 미안해.
시은: (맞는지 어쨌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엄마: 그런 마음은 부러움이라고 하는거야.
시은: 부러움..
엄마: 그런데 엄마는 말야, 시은이를 안고가던 손을 잡고가던 똑같이 시은이 사랑해.
시은이가 엄마한테 안기고싶다면,
이따 집에가서 엄마가 무거운 짐 놓고 두꺼운 옷 벗고 실컷 안아줄게
(사실, 집에서는 안지도 못하게 한다.ㅋㅋ)
시은: (조금은 안정을 찾은 얼굴로 삐죽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엄마: 자, 이제 그럼 엄마의 따뜻한 손을 꼭 잡고 집까지 씩씩하게 걸어가볼까??
시은: 좋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은이의 말이다)
...
드디어 종료...
어떤 집요한 마음을 어렵게 내려놓았을 때 얻곤했던 의외의 수확이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이던가?
난 아이에게 그날 내 체면을 내려놨던 것에 대한 댓가로 값진 선물을 받았다.
그날 아빠는 또 출장을 갔고 난 그때처럼 추운 날씨에 발을 동동거리며 시은이를 데리러 갔다.
물론 그때의 일은 이미 잊고있었는데…
시은이는 엄마를 보자마자 역시 환한 얼굴로 웃으며 내게 안겼고,
곧이어 내 귀에 소곤댔다.
“엄마, 오늘은 엄마한테 안아달라고 안하고 씩씩하게 걸어갈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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